능소화 피는 골목 2화 "(과수원에서의 대화)"

> # 《능소화 피는 골목》



능소와 국이의  포스트 사진





##2화: 과수원에서의 대화



*"사랑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마치 여름 소나기처럼, 마치 능소화가 하룻밤 사이에 피어나듯이. 그날 우리는 꿈을 이야기했다. 서로 다른 세상에서 자란 우리의 작지만 소중한 꿈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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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4년 7월, 대구 근교 시골 용천마을 새벽 5시

"꼬끼오—!"

수탉의 울음소리가 마을 전체를 깨웠다. 능소는 새벽 일찍 일어나 마당에서 닭들에게 모이를 뿌렸다. 

"능소야, 와 이리  일찍 일났노?"

어머니 박금순이 부엌에서 나오며 물었다.

"그냥... 잠이 안 와서요."

사실 능소는 밤새 국이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제 처음 만난 그 청년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혹시 어제 그 서울 양반 때문에  카나?"

어머니의 예리한 질문에 능소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엄마가 뭔 소립니꺼!"

"아이고, 우리 딸래미  얼굴 좀 봐라. 홍시가 따로 없네."

박금순은 딸의 마음을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스무 살에 결혼해서 능소를 낳았던 자신도 첫사랑의 떨림을 기억하고 있었다.

"엄마, 진짜 아이라 캉께네!"

능소는 바구니를 들고 과수원으로 향했다. 아침 일찍 사과나무에 물을 주는 것이 그녀의 일과였다.



과수원에 도착한 능소는 물호스를 끌고 와서 사과나무들에게 물을 주기 시작했다. 이제 막 동이 트기 시작한 하늘이 연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일찍 일어나시네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능소는 깜짝 놀라 뒤돌아봤다. 국이가 서 있었다.

"어... 어떻게 이렇게 일찍...?"

"할머니가 새벽에 마당 물 주신다고 해서 일어났는데, 여기서 물소리가 나더라고요."

국이는 소매를 걷어올리며 말했다.

"도와드릴게요."

"아입니더 , 혼자 할 수 있어예."

"어제 약속했잖아요. 일 도와준다고."

국이는 이미 능소 옆으로 다가와서 물호스를 건네받았다. 능소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말없이 사과나무들에게 물을 주었다. 이른 새벽의 조용함 속에서 물소리만이 리듬감 있게 들려왔다.

"능소씨."

"예에?"

"어제 꿈 꾸셨어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능소는 당황했다. 사실 국이 꿈을 꿨지만 말할 수는 없었다.

"왜... 왜 그런 걸 물어봐예?"

"저는 꿈을 꿨거든요. 능소화가 만발한 정원에서 누군가와 책을 읽는 꿈."

능소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 그게 저였어요?"

국이는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분명히 능소씨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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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전 8시, 아침 식사

"아이고 야야 , 국이도 왔나!"

박금순은 국이를 보자 반가워하며 밥상을 더 큰 것으로 바꿔 차렸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어서 안자라 . 시골 밥상이지만 마이 무라."

김대봉은 여전히 국이를 경계하는 눈빛이었지만, 어제보다는 누그러진 표정이었다.

"서울서는 뭘 공부하노?"

"경영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경영학? 그게 뭔고?"

"회사를 운영하는 방법을 배우는 거예요. 사업을 하려면 알아야 할 것들이 많거든요."

"사업이라..." 김대봉이 막걸리 한 잔을 걸치며 말했다. "요즘 젊은것들은 다 사업한다 카더라. 그런데 농사가 제일 기본 아니겠나?"

"맞는 말씀이에요. 농업이야말로 모든 산업의 기초죠."

국이의 대답에 김대봉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래, 그 말이 맞다. 사람이 무야 사는 긴데, 농사를 무시하면 클라지."

능소는 국이가 아버지의 마음을 사로잡는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그런데 국이 씨는 어떤 사업을 하고 싶으예?"

능소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처음에는 작은 무역회사를 시작하고 싶어요. 우리나라 좋은 농산물을 외국에 수출하는 일이요."

"농산물 수출이라고?"

김대봉의 눈이 반짝였다.

"네, 우리나라 사과나 배 같은 과일들이 품질이 정말 좋거든요. 외국 사람들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요."

"거기 가능하나?"

"물론이에요. 지금은 어렵지만, 앞으로는 분명히 가능할 거예요."

능소는 국이의 당당한 모습에 마음이 설레었다. 꿈을 이야기할 때의 그는 더욱 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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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전 10시, 과수원에서

아침 식사 후 네 사람은 다시 과수원으로 나왔다. 오늘은 사과 솎기 작업을 마저 해야 했다.

"국아, 니는 어제 처음 해봤는데도 손재주가 좋더라."

김대봉이 국이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능소씨가 잘 가르쳐줘서요."

능소는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능소 저 애는 어릴 때부터 농사일을 도왔거든. 손재주가 좋아."

"그래서 그렇게 능숙하셨구나."

국이는 능소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능소 씨는 정말 대단해요. 농사일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고."

"아니에요..." 능소는 더욱 얼굴을 붉혔다.

부모님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딸의 마음과 이 서울 청년의 마음을 모두 눈치채고 있었다.

"너거 둘이는 저짜  과수원 끝까지 가서 일해라. 우리는 이쪽에서 하께."

박금순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머니..."

능소가 당황했지만, 국이는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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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수원 끝자락에서

두 사람만 남게 된 과수원 끝자락은 더욱 조용했다. 멀리서 매미 소리와 새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능소씨, 정말로 도서관 사서가 되고 싶어요?"

국이가 사과나무 가지를 정리하며 물었다.

"네... 어릴 때부터 꿈이었어예."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능소는 잠시 손을 멈추고 먼 산을 바라봤다.

"초등학교 때 학교 도서관에서 처음 『빨간 머리 앤』을 읽었어예. 그때 책 속 세상이 너무 신기했어예. 앤이 사는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 가보고 싶기도 하고..."

국이는 능소의 순수한 표정을 바라봤다.

"그때부터 책이 좋아졌어예. 책을 읽으면 여기서 못 가본 곳도 갈 수 있고, 만나지 못한 사람들도 만날 수 있잖아예."

"그렇죠. 책은 정말 마법 같아요."

"국이 씨는 왜 사업을 하고 싶으예?"

이번에는 능소가 물었다.

"저희 아버지가 작은 가게를 하셨거든요. 어려운 집안이었는데, 아버지가 정말 열심히 일하셨어요.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저도 뭔가 큰 일을 해보고 싶었어요."

국이의 목소리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성공해서 우리나라를 더 잘 사는 나라로 만들고 싶어요. 지금은 우리가 외국에 많이 의존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우리도 다른 나라를 도울 수 있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능소는 국이의 큰 꿈에 감동했다.

"대단함니다... 저는 그런 큰 꿈은 꿔본 적이 없어예."

"아니에요. 능소씨의 꿈도 충분히 크고 아름다워요."

"제 꿈이요?"

"네.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사람들이 꿈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잖아요. 그보다 더 소중한 일이 어디 있겠어요?"

능소는 처음으로 자신의 꿈을 이렇게 큰 의미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국이 씨... 진짜로 그렇게 생각해요?"

"물론이에요. 꿈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아요. 진심이 중요하죠."

국이는 능소에게 다가가서 그녀의 손에 묻은 흙을 털어주었다.

"이 손이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줄 손이라고 생각하니까 더욱 소중해 보여요."

능소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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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심시간

"너희들 일은 잘 됐나?"

박금순이 점심상을 차리며 물었다.

"예에, 어무이. 국이 씨가 많이 도와주셨어요."

"그래? 우리 국이 고맙네."

김대봉도 국이를 보는 시선이 많이 부드러워졌다.

"국이야, 서울 가면 우리 같은 시골 사람들 생각날 것 같나?"

"당연히 생각날 거예요. 아니,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국이는 능소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서 보낸 시간들은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능소는 국이의 시선을 받으며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런데 언제까지 여 있을 끼고?"

김대봉이 물었다.

"한 달 정도 있을 예정이에요."

"그럼 한 달 동안 우리 일 도와줄 수 있겠네."

"네, 기꺼이요."

박금순과 김대봉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한 달이면 충분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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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후 2시, 능소화 골목

점심 식사 후 능소와 국이는 어제처럼 능소화 골목에 앉았다. 능소는 『어린 왕자』를 읽고, 국이는 그 모습을 바라봤다.

"능소씨."

"예?"

"혹시 서울에 가보고 싶지 않아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능소는 책에서 고개를 들었다.

"서울이요?"

"네. 도서관도 많고, 서점도 많고... 능소씨가 좋아할 만한 곳들이 많아요."

능소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가보고는 싶어예... 하지만 저는 여기가 좋아예."

"여기가 왜 좋아요?"

"가족들도 있고, 능소화도 있고..." 능소는 국이를 살짝 바라보며 말했다. "소중한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국이는 '소중한 사람들'이라는 말에 가슴이 뛰었다. 혹시 자신도 그 안에 포함되는 걸까?

"저도 여기가 좋아요."

"진짜로요?"

"네. 여기는... 마음이 편해져요. 서울에서는 항상 바쁘고 경쟁해야 하는데, 여기서는 그냥 저 자신이 될 수 있어요."

두 사람은 능소화를 바라보며 조용히 앉아 있었다. 주황빛 꽃들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렸다.

"국이 씨."

"네?"

"한 달 후에 서울 가면... 저 잊을 거예요?"

능소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국이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절대 잊지 않을 거예요."

"약속해 주세요."

"약속할게요. 능소씨도 저를 잊지 말아요."

"네... 절대 안 잊을 거예요."

두 사람의 작은 약속이 능소화 향기에 실려 바람에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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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저녁, 능소네 집

"능소야, 너 요즘 표정이 많이 밝아졌노."

아버지가 저녁상에서 말했다.

"그래요?"

"그래. 뭔 좋은 일 있나?"

어머니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냥... 날씨가 좋아서요."

"날씨가 좋아서?" 아버지가 웃었다. "그 서울 양반 때문 아이고?"

"아버지!"

"뭐가 부끄럽노? 좋은 사람 만나는 게 나쁜 일인가?"

박금순이 남편을 타일렀다.

"이 양반이, 아 부끄럽게 하지 마라 카이."

"부끄럽긴 뭐가 부끄럽노. 우리 능소 좋은 사람 만나는 거 좋은 일이지."

능소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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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소의 방

능소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오늘 하루 종일 국이와 함께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이게 사랑일까?'

처음 느끼는 감정이라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국이 생각만 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는 것이었다.

창문 너머로 능소화가 달빛에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마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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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시간, 최순례 할머니 댁

국이도 잠자리에 누워 능소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순수한 사람이 있을 수 있나?'

서울에서 만난 또래 여자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능소에게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있었다.

'한 달이 너무 짧다.'

벌써부터 헤어질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팠다.

할머니가 방문을 살짝 열고 들어왔다.

"국아, 잠 안 오나?"

"할머니, 아직 잠이 안 와요."

"혹시 능소 가 때문이 아이가?"

국이는 깜짝 놀라 할머니를 바라봤다.

"할머니가 어떻게...?"

"이 할매가 몇 살인 줄 아나? 사람 마음 보는 눈은 있다."

할머니는 국이 옆에 앉으며 말했다.

"능소 그 애는 정말 좋은 애다. 마음도 착하고, 부모님도 좋은 분들이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국아, 니 진심이가?"

"네?"

"그 애한테 상처 주면 안 된데이. 시골 애들은 도시 애들보다 순수하거든."

국이는 할머니의 말뜻을 알 수 있었다.

"저는 진심이에요, 할머니."

"그래? 그럼 댔다"

할머니는 국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좋은 사람 만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소중히 여겨라."

"네, 할머니."

할머니가 나간 후, 국이는 창문 너머 능소화를 바라봤다. 내일이 더욱 기다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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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화 예고**

*"이번 주말 마을 축제가 있는데, 같이 갈래요?"*
*능소의 제안에 설레는 국이. 마을 축제에서 두 사람은 처음으로 손을 잡게 되고, 국이는 능소에게 특별한 선물을 준비하는데... 과연 그 선물은 무엇일까?*



*3화 "마을 축제의 밤"에서 계속..





**이 작품은 픽션이며, 실제 인물이나 단체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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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 2025 능소화 피는 골목. 이 작품의 모든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으며, 저작권자의 사전 허가 없이 복제, 배포, 전송, 전시, 공연, 방송, 각색, 번역 등의 행위를 금지합니다. 위반 시 저작권법에 따라 민형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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