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능소화 피는 골목》 6화 - 이별의 아침
---
1984년 8월 18일, 새벽 5시.
능소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창밖으로 새벽빛이 스며들고 있었지만, 마음은 어둠 속이었다. 오늘이면 국이가 떠난다.
베개 밑에서 어젯밤 쓴 편지를 꺼내 다시 읽어보았다. 몇 번을 고쳐 쓴 끝에 겨우 완성한 편지였다.
"이게 마지막일까..."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혼잣말을 했다. 펜던트의 능소화 모양이 새벽빛에 반짝거렸다.
---
같은 시각, 할머니 댁.
국이도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짐은 이미 다 쌌지만, 정작 마음의 준비는 되지 않았다.
"국이야, 잠 못 자나?"
할머니가 방문을 살짝 열고 들어오셨다.
"예, 할머니..."
"그렇지, 떠나기 싫을 거야. 할머니도 서운하구나."
할머니가 국이 곁에 앉으시며 말씀하셨다.
"할머니, 제가 너무 어린 건 아닐까요? 능소와..."
"아니다. 나이는 숫자일 뿐이야. 마음이 진짜면 되는 거지."
"하지만 서울에 가면..."
"진짜 사랑이면 견뎌낼 수 있어. 할아버지하고 나도 그랬거든."
할머니의 주름진 손이 국이의 어깨를 토닥였다.
"할머니는 어떻게 하셨어요?"
"편지 썼지. 매일매일. 그때는 지금처럼 전화도 없었는데..."
할머니의 눈에 그리움이 어렸다.
---
오전 7시, 능소네 집.
"능소야, 일어나라. 아침 먹어야지."
어머니의 부름에 능소는 겨우 일어났다. 거울을 보니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밤새 울었구나."
"아니야..."
"괜찮다. 어무이가 다 알아."
어머니가 딸을 꼭 안아주었다.
"어무이, 나는 어떻게 해야 해?"
"아가야, 사랑은 붙잡는다고 되는 게 아니야. 보내줄 줄도 알아야 해."
"보내주기가 너무 어려워..."
"그래, 그게 사랑이야. 쉬웠으면 사랑이 아니지."
식탁에는 능소가 좋아하는 계란말이와 미역국이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목에 넘어가지 않았다.
---
오전 9시, 능소화 골목.
평소보다 일찍 나온 능소는 골목에서 국이를 기다렸다. 오늘은 하얀 원피스를 입고 나왔다. 국이가 예쁘다고 했던 옷이었다.
"능소야!"
국이가 큰 가방을 메고 나타났다. 평소와 달리 표정이 어두웠다.
"왔구나..."
"응, 미안. 좀 늦었지?"
"아니야, 나도 방금 나왔어."
둘 다 어색했다. 마지막이라는 게 이렇게 무거운 줄 몰랐다.
"능소야, 오늘 하루 어떻게 보낼까?"
"그냥... 평소처럼. 아니면 특별한 게 더 아플 것 같아."
국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능소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았다.
---
"여기, 편지."
능소가 정성스럽게 봉한 편지를 내밀었다.
"나도."
국이도 두꺼운 편지를 꺼냈다.
"많이 썼네?"
"응,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둘은 서로의 편지를 받아들었다. 손이 닿는 순간 전기가 흘렀다.
"지금 읽어도 돼?"
"나중에... 혼자 있을 때."
"알겠어."
편지를 가슴에 품은 국이의 모습을 보며 능소는 마음이 아팠다.
---
오전 10시, 과수원.
"여기 처음 왔던 날 기억나?"
"응, 네가 사과 따는 걸 도와줬잖아."
"그때 넌 정말 어색해했어."
"지금도 어색해."
둘 다 웃었다. 짧은 웃음이었지만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능소야, 이 나무 기억해둬.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응."
국이가 사과나무 한 그루에 손을 대며 말했다.
"이 나무가 증인이야. 우리 사랑의."
"바보같은 소리..."
능소는 부끄러워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기뻤다.
---
"능소야, 사진 한 장 더 찍자."
"어제도 많이 찍었잖아."
"오늘은 마지막이니까."
국이가 카메라를 꺼냈다. 이번에는 과수원을 배경으로 했다.
"웃어봐."
"어떻게 웃어..."
"억지로라도. 나중에 이 사진 보면서 웃었던 모습 기억하고 싶어."
능소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있었지만.
셔터 소리가 운명처럼 들렸다.
---
오후 1시, 마을 식당.
"많이 먹어."
"너도."
둘 다 입맛이 없었지만 억지로 숟가락을 들었다. 냉면 한 그릇을 나눠 먹었다.
"능소야, 서울 가서 제일 그리울 게 뭐 같아?"
"너..."
"나 말고."
"음... 이 냉면? 서울에는 이런 냉면 없을 거야."
"그럴까? 그럼 방학 때마다 와서 먹어야겠네."
"정말 올 거야?"
"당연하지. 약속했잖아."
하지만 둘 다 확신이 없었다. 세상은 생각보다 넓고, 사람은 생각보다 약했다.
---
오후 3시, 마을 뒷산 정상.
어제와 같은 바위에 앉아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여기서 보면 세상이 참 작아 보여."
"응, 그래서 좋아."
"서울은 너무 클 거야."
"무서워?"
"조금... 너 없이 혼자 사는 게."
국이가 능소의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나도 무서워. 너 없는 서울이."
"그럼 가지 마."
능소가 갑자기 말했다.
"뭐?"
"가지 마. 여기 있어."
"능소야..."
"알아, 안 된다는 거.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이었어."
국이가 능소를 꼭 안았다. 처음으로 진짜 안아주었다.
"미안해..."
"괜찮아. 나도 알고 있었어."
---
오후 5시, 능소화 골목.
마지막 산책이었다. 능소화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이 꽃들도 우리 이야기 다 알고 있을까?"
"그럴 거야. 매일 여기서 만났으니까."
국이가 능소화 한 송이를 조심스럽게 꺾었다.
"이거 가져갈게."
"시들 텐데..."
"말려서 책갈피로 쓸 거야. 그럼 오래 남을 거야."
능소도 한 송이 꺾었다.
"나도."
둘은 서로의 능소화를 바꿔가졌다.
---
오후 6시 30분, 마을 버스정류장.
드디어 이별의 순간이 왔다. 서울행 버스가 저 멀리서 오고 있었다.
"능소야..."
"응..."
"잊지 마."
"응, 너도."
"편지 꼭 써."
"응, 너도."
같은 말만 반복했다.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목구멍에 막혀있었다.
버스가 멈춰섰다. 몇 명의 승객이 내리고, 국이가 타야 할 차례였다.
"이제 가야겠다."
"응..."
국이가 능소의 뺨에 입맞춤을 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였지만 상관없었다.
"사랑해."
"나도..."
국이가 버스에 올라탔다. 창가 자리에 앉아 손을 흔들었다.
버스가 출발했다.
능소는 버스가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오후 7시, 능소네 집.
"왔구나."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능소의 빨간 눈을 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어무이..."
"응."
"국이 갔어."
"그렇구나."
"이제 어떻게 해?"
"기다리는 거지. 사랑하니까."
능소가 어머니 품에 안겨 펑펑 울었다. 참고 있던 눈물이 터져나왔다.
"울어도 돼. 실컷 울어."
어머니의 품은 따뜻했다. 국이 없는 세상에서 유일한 위안이었다.
---
그날 밤 10시.
능소는 국이의 편지를 펼쳤다.
"사랑하는 능소에게,
이 편지를 쓰는 지금도 가슴이 아파. 내일이면 정말 너를 떠나야 한다니.
이번 여름이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었어. 너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영원히 모르고 살았을 거야. 진짜 사랑이 뭔지.
서울에 가서도 매일 너를 생각할 거야. 아침에 눈 뜨면서부터 밤에 잠들 때까지. 그러면 외로워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편지 꼭 써줘. 너의 글씨를 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날 거야.
그리고 꼭 기억해. 우리 사랑은 거리로 끝날 수 있는 게 아니야. 능소화가 해마다 피어나듯이, 우리 사랑도 계속될 거야.
10년 후에 다시 만나자. 그때도 이 골목에서. 약속해.
영원히 사랑하는 국이가
P.S. 목걸이 잘 차고 다녀. 그걸 보면서 나를 생각해줘."
편지를 다 읽고 나니 눈물이 다시 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슬픔만이 아니었다. 희망도 함께 있었다.
---
같은 시각, 서울로 향하는 버스 안.
국이는 창밖의 어둠을 바라보며 능소의 편지를 읽고 있었다.
"사랑하는 국이오빠에게,
벌써 보고 싶어. 버스 타는 모습을 보는데도 믿기지 않아.
이번 여름은 꿈같았어. 동화 속 공주가 된 기분이었거든. 오빠가 왕자님이고.
서울에 잘 도착하면 편지 써줘. 몇 번이고 읽을 거야.
나는 여기서 오빠를 기다릴게. 능소화가 지고 또 피고 하는 동안 계속 기다릴게.
절대 잊지 마. 용천마을에 능소라는 여자가 오빠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10년 후에 만나자는 약속, 잊지 않을게.
사랑하는 능소가
P.S. 능소화 잘 간직해줘. 그게 우리 사랑의 증거야."
국이도 눈물을 흘렸다. 21살 청년에게도 이별은 너무 아팠다.
---
1984년 8월 19일, 새벽 6시.
능소는 능소화 골목로 나왔다. 국이 없는 첫 아침이었다.
능소화들이 어제와 똑같이 피어있었다. 하지만 국이는 없었다.
"오빠..."
작은 목소리로 불러보았다. 대답은 바람 소리뿐이었다.
벤치에 앉아 어제 받은 능소화를 바라보았다. 벌써 조금 시들어가고 있었다.
"시들어도 괜찮아. 추억은 시들지 않으니까."
그때 바람이 불어 능소화 꽃잎 몇 개가 떨어졌다. 마치 눈물 같았다.
하지만 능소는 울지 않았다. 이제 기다림이 시작이었다. 슬퍼할 시간에 사랑할 시간이었다.
"10년 후에 만나자. 약속했잖아."
능소는 목걸이를 꼭 잡고 집으로 돌아갔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국이 없는 하루가.
---
## 🌸 **다음 화 예고 **
*"국이 오빠가 간지 벌써 한 달이나 됐다 아이가... 편지는 오는데 뭔가 달라진 것 같아. 서울 생활이 바쁜가 보네. 그런데 나도 변하고 있어. 좀 더 씩씩해지고 있다 카이. 도서관에서 일도 시작했고... 하지만 가끔 너무 그립다 아이가. 오빠 목소리가, 오빠 웃음소리가... 과연 우리 사랑은 이 시간을 견뎌낼 수 있을까? 다음 화 '편지 속의 마음'에서 확인하이소."*
---
**태그: #대구근교 #시골로맨스 #1980년대 #첫사랑 #능소화 #청춘드라마 #향수 #농촌생활 #순수사랑 #이별 #폭삭속았수다**
**저작권: © 2025 능소화 피는 골목. 무단복제 및 재배포 금지.**